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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3 00:00

광교산 비문, 채제공과 김준용 욕되게 하는 것




1977년 3월 17일 | 출처: 동아일보


340여년만에 발견된 김준용장군의 전승비 호란때 양고이부수 섬멸 실증

수원시 하광교동 광교산에서 병자호란때 적장 양길리 부대를 섬멸한 충양공 김준용장군의 전승지비문이 3백40여년만에 수원시 문화재조사반에 의해 발견돼 속칭 호항곡 골짜기가 격전지였음을 실증했다.


호남병마절도사로 있던 김장군은 당시 의병을 모집, 남한산성에 주둔한 청태종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 부대를 광교산으로 유인해 격전을 벌여 양고리 등 적장 3명을 격살한 뒤 자신도 전사했었다는 것.


1977년 10월 13일 | 출처: 두산백과 경기(도)기념물 제38호 지정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下光敎洞)에 있는 김준룡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 1-1


정조대에 이르러서 화성 축성을 총관장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김준룡 장군의 업적을 기억하고 광교산 전첩(戰捷) 장소의 자연암벽(自然岩壁)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다. 기념비인 의성탑(義聖塔)의 크기는 세로 1.35m, 가로 0.90m이며, 바위 중앙에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새겨져 있고 좌우에는 ‘병자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새겨져 있다.

 

출처: 문화재청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8호 지정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소재지: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대: 조선시대 

 

내용: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1586~1642)장군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암반에 새긴 글자이다. 정조 때 화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간 사람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축성책임자 채제공이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암반을 갈아‘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새기고, 그 좌우에 ‘勤王至此殺淸三大將, 丙子淸亂公提湖南兵’이라는 전승의 내용을 새겨 놓았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안내판


‘전하는 말에 의하여 정조 때 수원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간 사람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축성 책임자 채제공이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암반을 갈아 '충양공김준용전승지'라 새기고 좌우에 '근왕지차살청삼대장''병자청란공제호남병'이라는 전승의 내용을 새겨놓았다.’


종합하면, 광교산 종루봉(비로봉) 부근 바위에 새겨진 김준용장군 비는 지난 1977년 3월 수원시문화재조사반에 의해 340년만에 새롭게 발견됐고 그 해 10월에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됐는데 


1794년경 수원화성 축성을 총괄하던 채제공이 김준용 장군에 대한 얘기를 건네 듣고 바위 중앙에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새기고 좌우에는 ‘병자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새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완전히 뒤집는 충격적인 기사 하나가 있다. ‘340여년만에 발견된 김준용장군의 전승비‘라고 쓴 1977년 동아일보 기사 보다,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그 해 보다 3년이나 앞서서 기획/연재로 쓴 1974년 11월 2일자 경향신문 ‘길’이라는 기사다.




1974년 11월 2일 | 출처: 경향신문 기획/연재 ‘길’


안양에서 수원으로 내려오는 길목 왼쪽으로 우뚝솟은 태산이 하나 나오는데 이 산이 고려때만해도 89암자가 있었다는 광교산이다. 주봉이 해발 5백82m나 되는 이 산의 창성사 절터에는 탑이 하나 서 있으니 병자호란때 청군을 크게 섬멸했다는 전승탑으로 그 이름은 의성탑이다.’


‘즉 이조 16대 인조 17년(1636년) 청태조가 이끄는 20만대병이 서울을 짓밟고 남한산성으로 피몽한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할때 당시 전라병사로 있던 김준용은 근왕병을 이끌고 이산에 이르러 청병과 일대혈전을 벌여 호장 세명의 목을 자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후 이산에 탑을 세웠으며 큰 바위에 ‘김준용전승야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 이라고 새기고 이곳을 의성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창성사에 병자호란때 청군을 크게 섬멸한 김준용장군 탑이 서 있는데 그 이름은 의성탑이다. ▲ 큰 바위(종루봉 부근)에 ‘김준용전승야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金俊龍戰勝也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 이라고 새기고 이곳을 의성대라고 불렀다.


-. 1977년 동아일보 기사처럼 ‘340년만에 새롭게 발견했다’면 그 보다 3년전인 1974년에는 전혀 몰랐어야 맞다. 하지만 경향신문 기자는 미래를 보 듯 정확히 기사를 작성했다. 따라서 김준용장군비는 1977년 이전부터 이미 일부 학계에 내용 등이 정확히 알려졌다고 볼 수있다.


고로, ① 지난 1977년 3월 수원시문화재조사반에 의해 340년만에 새롭게 발견됐다는 것은 허구다- 최소 3년전에 이미 발견됐다. ② 김준용장군비를 새긴 바위를 의성대라 불렀다. ③ 창성사 절터에 전승탑을 세웠으며 그 비를 의성탑이라 불렀다. ④ 현재 충양공김준룡전승지병자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忠襄公金俊龍戰勝地 丙子淸亂公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으로 새겨져있지만 최소 1974년도까지는 김준용전승야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金俊龍戰勝也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새겨져있었다.-누군가 바위에 새겨져 있던 글을 지우고 다시 썼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암반을 갈아서 만든 것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 중요한 단서 몇가지가 있다.


▶ 현재 바위에 새겨져 있는 ‘병자청란(丙子淸亂)이라는 글자는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정의되지 않은 글자며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인 호자를 쓴 ‘병자호란’이 표준어라고 답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병자호란’만이 게재돼 있으며 ‘병자청란’이라는 말은 없다.


▶ 1920년부터 1999년까지의 신문자료, 과거 뉴스를 모아놓은 뉴스라이브러리를 보더라도 ‘병자청란’으로 검색하면 기사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검색하면 800여개의 기사가 나온다. 뉴스에서도 병자청란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병자청란'이라는 단어는 1936년 논문 제목으로 나온다. 그것이 유일하게 검색된 공식적인 병자청란이라는 단어의 흔적이다. 언제 사용됐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때 또는 그 무렵부터 사용됐던 말로 추정된다.


글귀 비교:  74년 경향신문 기사내의 글귀 김준용전승야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金俊龍戰勝也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 (19字) / 현재 새겨진 충양공김준룡전승지병자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忠襄公金俊龍戰勝 地丙子淸亂公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 (27字)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글귀는 간략하다. 也는 어조사로 也를 제외하면 양쪽이 9자로 글귀의 음률이 정확히 맞다. 김준용 이름 석자, 호남병이었다는 소속, 청나라 왕의 심복 삼대장 무찌른 사실 등만 군더더기 없이 기술했다.


반면, 현재 바위에 새겨진 문구는 김준용앞에 (충양공)이라는 호를 적어 그를 높였다. 이곳이 (전승한 그 자리)임을 분명히 지정한 지(地)라는 표현을 썼다. 청나라와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 (병자청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 다시 호남병 앞에 공(公)이라는 높인말을 사용했다. 충양공 김준용전승지 라는 글자를 빼고 나머지 글자로 봤을때 한쪽은 10자, 한쪽은 9자로 음률이 맞지 않는다.


광교산 전투는 병자호란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며 청나라 왕의 심복 장수 3명의 목을 자른 혁혁한 전투로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김준용이다. 그 정도라면 ‘영웅’이라고 새겨도 결코 과하지 않다. 하지만...


 광교산 전투 승리하던 해인 1636년(인조14) 김준용장군은 (지방직 종2품) 전라도병마절도사였다. 1640년(인조18)에는 (지방직 종3품)인 김해도호부사로 강등된다. 그 이듬해인 1641년(인조19)에는 (지방직 종2품) 영남절도사로 마감한다. 당시 김준용 장군은 큰 승리를 거둔 후에도 지방직을 전전했다. 임금이 상을 내렸다거나 중앙관직에 진출했다거나 승진을 했다는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영웅시 하고 있는 현재의 글귀와 다르다.


(좌: 현재 광교산 바위에 새겨진 김준용장군비 우: 경향신문 기사의 글귀를 포토샵으로 작업한 이미지) <2006년 사진>


(현재 광교산 김준용장군비, 비문이라 볼 수 없을만큼 새긴 형태가 조잡. 우측 하단에는 '兵' 자도 사라짐) <2006년 사진>

 

 

▣ 추정 결론


1636년 병자호란때 광교산에서 김준용장군이 이끄는 의병들은 크게 승리를 한다. 이후 김준용장군의 전승을 기념하는 의성탑을 창성사에 세웠다. 그리고 종루봉(비로봉) 부근 전승지 큰 바위에 ‘金俊龍戰勝也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새기고 의성대라 불렀다.


또는(혹은),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가 벌어진 후 100여년이 지난 후 수원화성 총책임자인 채제공이 김준용장군에 대해 듣고 전승을 기념하는 의성탑을 창성사에 세우고 종루봉(비로봉) 부근 전승지 큰 바위에 ‘金俊龍戰勝也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라고 새기고 의성대라 불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비석들은 문화재위원 등 학계에 보고됐고 경향신문은 그 기록을 토대로 74년 ‘길’이라는 기획/연재에서 광교산 김준용장군의 흔적을 조목조목 실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후 누군가 창성사를 방문, 의성탑을 반출하고 김준용 장군을 영웅화시키기 위해 (70년대였음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암반을 갈아 원래 새겨져 있던 글을 지우고 ‘忠襄公金俊龍戰勝地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글귀를 새겨놓았다. 그런데 실수로(또는 친일교육을 받은 사람이기에) 일제강점기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자청란’이라는 단어를 넣고 말았다.


3년이 흐른 77년 3월 17일, 동아일보는 수원시 문화재조사반에 의해 340년만에 김준용장군의 전승기록이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발견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구와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발견한 날로부터 7개월이 지난 10월 18일 관은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했다.


김준용장군비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잘 알려진 이순신 장군을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순신전승也제호남병 근왕지차살矮(倭)삼대장’이라고 쓴 것을 ‘忠武公이순신전승地 壬辰日亂公제호남병 근왕지차살日삼대장’이라 고친 꼴이다. '병자호란'을 '병자청란'이라 새긴 것은 ‘임진왜란'을 '임진일란'으로 새긴 것과 같은 것이다. (수원지역 모 국어교사 표현)


포토샵을 이용해 김준용장군비 원래의 모습이라 생각되는 현장을 재현해 봤다.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현재의 글자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또 전승지 좌.우에 써 있는 글자들이 얼마나 조잡하고 가까이에서 봐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졌는지 그 현장을 가면 다시금 되새겨보기 바랍니다. 


암반을 갈고 새로 새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글귀, 채제공과 김준용 두 분을 모두 욕되게 하는 것이다.

광교산 김준용장군비는 경기도기념물 제38호다.


참고자료 ( 김준용장군 비)

 

(2001년 김준용장군비 출처: 수원시포토뱅크)

 

 

(2006년 김준용장군비 출처: 수원시포토뱅크)


(1974년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문구를 사용해 김준용장군비를 만든 이미지)

 

아래 사진은 참고 사항으로, 지난해 8월, 바르게살기 연무동위원회에서 정화작업을 마친 후 찍은 기념 사진이다. 사람이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위치에 김준용전승비가 자리하고 있어 밧줄, 지지대 등 특별한 작업 도구가 없이도 비문을 새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나라의 3대 권력자인 영의정 채제공의 지시로 비문을 새겼다면 비교적 쉬운 작업환경에서 현재처럼 조잡한 비문이 탄생할 수 없다는 뜻이며 두 번째는 왜곡과 조작이었다면 어려움 없이 쉽고 빠르게 작업이 가능했으리란 점이다. (사진출처:인터넷)

 

 


* 결론: 지난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광교산 '김준용장군전승지 및 비' 기념물 지정에 대한 이의제기는 국내 주요 언론사인 경향신문에서 세상에 있지도 않은 물건에 대해 상상으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보기 힘들기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 판단된다. 특히, 문구까지 정확히 제시했기에 이 기념물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 확정 지을 수 있는 물증이 부족하기에 물증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고 결론이 날때까지 이 기념물은 '지정'에서 '재심의'로 변경함이 정당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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